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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ure

2018년 비엔나, 모더니즘을 기념하다.

by 힘멜 2018. 2. 19.

2018년 비엔나, 모더니즘을 기념히다.

올해는 비엔나의 모더니즘을 이끈 중요한 네 명의 인물들이 죽은 지 100년째 되는 해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1862-1918)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

오토 바그너 Otto Wagner (1841-1918)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1868-1918)


그를 기념하여 도시 곳곳에선 여러 전시, 공연, 행사들이 활발히 진행중이다.

몇 년 전, 한국 관련 협회 뉴스레터에 비엔나에 관한 글을 기고한 글이 있어

나름의 소소한 방식으로 이 도시의 뜻깊은 해를 기념해본다.




기존 제도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예술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체제시온, 1897)의 숭고했던 정신은 황금빛 나뭇잎으로 덮인 둥근 돔과 그 시대를 함께 한다. 보수적인 역사주의에 반기를 들며 새 시대의 얼굴을 찾으려던 젊은 지식인들의 노력은 과거의 양식적 요소를 반복적으로 답습하던 구세대에 대한 반항이자, 예술의 자유를 향한 의지였다.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화려한 건물과 신고전주의 양식들로 빼곡히 채워진 링슈트라세(Ringstraße)는 봉건성에 사로잡힌 빈의 세기말 위기를 보여주는 전형이었으며, 젊은 예술가로 하여금 틀에 박힌 매너리즘과 경직된 고전과의 결별을 고하는 단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우리는 구세대를 향한 빈 분리파의 날 선 비판을 링슈트라세 바깥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Bwag/Commons


Vienna Secession Building, Joseph Maria Olbrich, 1897

빈체제시온,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1897


지붕의 황금색 돔은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이용한 유기적인 형태를 추구했던 아르누보 양식의 전형적인 예시인데,

'새 시대에 맞는 예술'을 외쳤던 빈분리파의 구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 시대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링 밖의 예술을 위한 자유의 흔적을 도심 속에서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예술은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양식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핵심은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을 통합하여 미술과 일상 생활의 유기적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르누보는 구불구불한 식물장식의 섬세하고 유연한 선적인 양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을 선두에서 이끌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당대 건축계의 거장이었던 오토 바그너(Otto Wagner)였다. 현재 칼츠 플라츠(Karlsplatz)역 출입구로도 사용되고 있는 카를 광장 파빌리온(Karlsplatz Pavillon)은 그의 대표작이다. 좌우대칭과 화려한 외관 장식으로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인상을 풍기기도 하는 이 작은 건물에서 고전주의와 결별하기 위한 그의 시도들이 엿보인다. 건물 입면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오더는 벽 내부로 편입되어 면을 분할하는 선적인 요소로만 남게 되고, 면 구조로 변형된 파사드는 화려한 금박 세공 장식을 위한 바탕을 제공한다. 현대적 재료인 철골과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회화적인 아르누보 양식의 미를 극대화하였으나, 기존의 고전주의 양식을 타파하기에는 빈약한 양식의 변화와 곳곳에 남아있는 고전 건축 어휘들의 잔재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 Thomas Wolf, www.foto-tw.de

CC BY-SA 3.0 DE


Karlsplatz Pavillon, Otto Wagner, 1899

칼스플라츠 파빌리온, 오토바그너, 1899



칼츠 플라츠 파빌리온과 더불어 현재까지도 많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은 지하철 4호선 케텐브뤼켄가세(Kettenbrückengasse)역에서 나와 고개를 약간만 돌리면 보이는 메다용(Medaillons), 마욜리카(Majolika) 공동주택이다. 지하철 4호선은 링에서 뻗어져 나온 도나우 강의 한 지류를 따라 도시를 관통하는데, 이는 당시 빈의 개조 계획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던 오토 바그너의 의도된 계획이었다. 하천을 따라 시내 철도와 도로를 나란히 가로지르며 그 기능을 다하는 Rechte, Linke Wienzeile 도로와 그에 면한 아르누보양식의 두 주택을 통해 그 당시 젊은 건축가들의 저항의 흔적을 찾아볼 수있다.


© Bwag/Commons


Majolikahaus, Otto Wagner, 1898

메다용, 마욜리카하우스, 오토바그너, 1898


분리파가 유리, 철골 등의 신소재를 이용하여 자연 형태를 모방한 식물 장식을 통해 그들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때, 그들의 새로운 양식 조차도 형태만 달랐을 뿐 이전의 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창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돌프 로스(Adolf  Loos)였다. 분리파가 보수적인 역사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그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체제시온의 금박 치장에 염증을 느끼고 장식이 배제된 순수한 형태의 디자인을 추구했다. 그 역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형식, 새로운 정신을 밝혀 나간 분리파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지만, 그에게 아르누보 양식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양식이 아니었다. 아돌프 로스는 1908년에 쓴 ‘장식과 죄악 Ornament and Crime’이라는 논문에서 의미 없는 장식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의 문화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장식의 종식을 선언한다.



©CC BY-SA 4.0


Looshaus, Adolf Loos, 1911

로스하우스, 아돌프 로스, 1911



그의 이러한 건축관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 호프부르크(Hofburg)가 위치한 미카엘 광장(Michaelerplatz)에 자리한 로스하우스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기단, 본체, 지붕의 고전적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내부 공간에서 필요로 하는 기능적인 창문들로만 외부의 입면이 규정된 이 건물은 철저한 합리주의적 면모를 지닌 건물이었다. 철저히 장식을 배격하고 오로지 경제성과 실리에 기반한 이 건물은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왕궁에 대한 모독이었으며, 아름다운 빈의 경관을 해치는 도시의 흉물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비판 속에서도 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건축, 진정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이룩하려는 그의 의지를 지켜나갔다. 이러한 시대적 마찰 속에서 빈의 거리는 로스에 의해 차츰 침묵과 절제의 아름다움을 배워나갔고, 여전히 구태와 봉건성 속을 헤매던 어둠을 벗어나 진정한 모더니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맞는 예술과 삶의 정신을 추구했던 그들의 외침은 오늘날 빈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다. 새로운 시대 정신을 찾기 위한 세기말 빈의 젊은 예술가, 건축가들은 그들의 유산을 통해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말하고 있다.


‘모든 시대에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